[기고] 평등교육실현을위한 전국학부모회 운영위원 여미애
수단의 도구화와 목적의 절대화
사회운동이 자신의 이상을 절대화하는 순간, 수단은 목적에 종속된 단순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때 폭력은 더 이상 윤리적 고민의 대상이 아니라 혁명적 필연성으로 정당화된다. 프랑스혁명기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공화국의 덕성”이라는 절대적 목적 앞에서 단두대를 정당한 수단으로 승인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 없는 덕성은 무력하다”고 선언하며 수만 명을 처형했으나, 정작 그 자신도 같은 논리에 의해 단두대로 향했다. 목적의 순수성은 수단의 잔혹함을 은폐하지 못한다. 현대 사회운동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리구조가 반복된다. “정의로운 대의”는 그 자체로 면죄부가 되어, 지지자들에 대한 폭력조차 “각성을 위한 필수적 과정”으로 미화된다. 동지는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이 되고, 운동은 연대의 장이 아니라 순수성 테스트의 장으로 변질된다.
인민재판의 논리: 혁명적 정당성과 법적 절차의 붕괴
문화대혁명기 중국의 비판투쟁대회(批鬥大會)는 혁명전야의 무분별한 인민재판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는지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홍위병들은 “반혁명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교사, 지식인, 당간부를 무차별 공격했고, 고깃간 주인도, 안경을 쓴 사람도 “부르주아”로 낙인찍혔다. 정당한 법적 절차는 “반동적 제도”로 치부되었고, 집단적 광기는 “혁명적 열정”으로 찬양되었다. 그 결과는 수백만 명의 희생과 10년간의 사회적 퇴행이었다. 오늘날 일부 사회운동에서 나타나는 “폭로-낙인-색출-추방”의 메커니즘은 이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SNS는 현대판 비판투쟁장이 되어 사적 심판이 공적 정의를 대체한다. 르네 지라르가 분석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집단의 내적 긴장은 “배신자” 한 명을 제거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 운동의 내파를 예고하는 징후일 뿐이다.
좌파적 칼 슈미트주의: 적과 동지의 정치신학
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로 정의했다. 이 실존적 이분법은 원래 파시즘의 논리였으나, 역설적으로 일부 좌파 운동에서도 내면화되었다. “네가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다”라는 논리는 회색지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비판적 동조자는 “계량분자”로, 전술적 이견은 “변절”로 규정된다. 정치는 대화와 설득의 공간이 아니라 전쟁터가 된다.
1960-70년대 신좌파 운동의 분열사는 이를 명증한다. 독일의 바더-마인호프 그룹,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일본의 적군파는 모두 내부 숙청과 분파주의로 자멸했다. 적군파의 야마다케시 린치사건은 극단적 사례다. “총괄”이라는 이름으로 동료를 고문하고 살해한 이들은 자신들이 “제국주의”와 싸운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동지를 가장 잔혹하게 파괴했다.
과도한 PC주의와 언어의 정치학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원래 차별과 억압의 언어를 성찰하려는 윤리적 기획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교조화될 때,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낙인의 도구가 된다. 미세한 표현의 차이가 “문제적 인간”을 판별하는 리트머스지가 되고, 실수는 용서받지 못하는 원죄가 된다. 주디스 버틀러가 경고했듯, 정체성 정치가 본질주의로 경직될 때 그것은 억압의 또 다른 형태가 된다. “취소 문화(cancel culture)”는 이러한 경향의 극단이다. 과거 발언, 잘못된 용어 사용, 불충분한 지지 표명 등이 누적되어 한 개인을 공적 영역에서 완전히 추방한다. 절차적 정의, 비례성의 원칙, 회복적 정의의 가능성은 모두 무시된다. 운동은 교정과 성장의 공간이 아니라 영구적 배제의 장치가 된다.
공포정치의 역설: 과격분자의 헤게모니
역사는 반복적으로 증명한다. 가장 과격한 소수가 다수를 침묵시킬 때, 운동은 그들의 인질이 된다. 스탈린주의 숙청은 공산당원 스스로를 가장 많이 죽였다. 매카시즘은 반공을 명분으로 미국 사회 전체를 감시국가로 만들었다. 과격분자의 헤게모니는 구성원들을 복종시키지만 동시에 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파괴한다. 충성은 확보하되 신뢰는 잃는다. 복수심은 충족되되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조리돌림의 공포는 가장 유능하고 성찰적인 활동가들을 침묵시키거나 떠나게 만든다. 남는 것은 교조와 기회주의자, 그리고 공포에 질린 순응자들뿐이다. 운동은 활력을 잃고 자기복제적 의례로 전락한다. 혁명은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다는 피에르 베르냥댕의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목적과 수단의 변증법적 통일을 위하여
진정한 해방의 정치는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요구한다. 자유를 위한 운동이 억압적일 수 없고, 평등을 추구하는 과정이 위계적일 수 없다. 연대는 순수성 테스트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들의 상호 인정에서 시작된다.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듯, 정치는 복수성의 인정이며, 차이 속에서 공통의 세계를 구성하는 실천이다.
사회운동이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이 싸우던 권력구조를 내면화한다. 비판은 연대의 반대가 아니라 더 깊은 연대를 위한 조건이다. 역사는 이미 충분히 증언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믿음이 결국 목적 자체를 배신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혁명이 아니라 혁명 이후의 아침, 동지들이 서로를 고발하며 단두대에 오르던 그 참담한 풍경이다.
